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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ginalia의 순간: 필립 로스, 돈 델릴로, 그리고 책에 메모글을 남기는 즐거움

2017년 12월 31일 | 도서관일반 | 코멘트 0개

“Marginalia(마지널리아)”라는 단어는 라틴어 “marginalis”에서 유래했으며, 이는 “가장자리(margin)에 있는”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영어로는 “margin(여백)”에 “-alia(…와 관련된 것들)”이라는 접미어가 붙어 만들어진 단어로, “책의 여백에 적은 글, 주석, 낙서, 메모 등”을 통칭한다. 원래 중세 필사본이나 초기 인쇄본의 여백에 필사자나 독자가 적은 짧은 설명이나 코멘트를 의미했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개인적인 생각, 감정, 질문, 해석 등을 적어 넣는 넓은 의미로 발전하였다. 오늘날에는 특히 독자나 작가가 독서 중 책의 여백에 남긴 글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이 단어는 미국의 작가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가 1844년에 자신의 에세이 모음집 제목으로 사용하면서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한 단상과 비판을 여백처럼 흩뿌려 놓았고, 그 형식을 그대로 제목으로 삼았다. 이후 “Marginalia”는 학문적, 문학적 맥락에서 독자의 적극적인 해석 행위를 상징하는 단어가 되었다.

최근 ‘마지널리아(Marginalia)’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독서 도중 책 여백에 적어두는 짧은 생각, 질문, 감정의 기록은 오랜 시간 동안 독자와 작가, 나아가 책 자체와의 깊은 대화를 가능하게 해왔다. 특히 미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필립 로스(Philip Roth)와 돈 드릴로(Don DeLillo)는 마지널리아를 통해 독서와 창작의 경계를 허물며 새로운 사유의 공간을 만들어낸 사례로 꼽힌다. 필립 로스는 자신이 읽은 책의 여백에 붉은 펜으로 꼼꼼히 주석을 달며, 작가로서의 날카로운 시선을 드러냈다. 로스가 소장했던 책들에는 밑줄과 함께 날카로운 코멘트가 가득했고, 그는 이를 통해 다른 작가들과 대화하고, 자신의 작품 세계를 점검했으며, 때로는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이러한 마지널리아는 그가 단순한 독자가 아닌, 적극적인 해석자였음을 보여준다. 돈 드릴로 역시 마지널리아를 창작 과정의 중요한 일부로 삼았다. 드릴로는 소설뿐 아니라 시, 역사책, 정치철학서 등 다양한 장르의 책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이며, 이를 통해 복잡한 서사 구조와 철학적 주제를 발전시켜 나갔다. 그의 메모는 단순한 감상의 차원을 넘어서, 독서 그 자체가 일종의 사유 실험이자 창작의 연장선임을 보여준다.

최근에는 디지털 시대에도 불구하고 종이책에 메모를 남기는 행위가 다시금 조명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아날로그 향수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독서 중 손으로 직접 적어 내려간 말들은 기억에 오래 남을 뿐 아니라, 독자가 책과 더욱 깊이 연결되는 매개가 된다. 또한 개인의 마지널리아는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독자에게 새로운 해석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문화적 유산이 되기도 한다. 도서관, 아카이브, 경매장 등에서 발견되는 유명인의 마지널리아는 문학 연구자들에게는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으며, 독서 문화의 다층적 면모를 드러내는 귀중한 흔적이다. 필립 로스와 돈 드릴로의 사례는 이러한 책 속 메모가 단지 사적인 기록을 넘어, 문학과 독서의 의미를 확장시키는 하나의 방식임을 보여준다.

마지널리아의 매력은 여전히 유효하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텍스트와 조용히 대화하는 일이자, 여백에 나만의 목소리를 남기는 작업이다. 이 조용한 습관이 다시금 주목받는 지금, 우리는 독서의 또 다른 기쁨을 다시 발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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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마지널리아(Marginalia)’가 주목받고 있다. 인쇄된 책의 여백에 연필이나 펜으로 무언가를 적는 행위를 일종의 모독처럼 여기는 사람이 많은 반면, 이를 적극적으로 찬양하는 이들도 있다. 최근 크리스티(Christie’s) 경매에서는 필립 로스(Philip Roth)와 돈 드릴로(Don DeLillo)의 초판본이 수백 개의 메모로 가득 채워진 상태로 출품되어 수십만 달러에 낙찰되었다.

마지널리아를 열렬히 옹호하는 인물로는 소설가이자 교육자인 팀 파크스(Tim Parks)가 있다. 그는 뉴욕 리뷰 오브 북스(New York Review of Books)에 연재 중인 자신의 흥미로운 블로그에서, 학생들에게 손에 펜을 들고 책을 읽게 하고, 매 페이지마다 반응을 적도록 지도한 이후로 그들의 비판적 사고력이 크게 향상됐다고 보고했다.

“우리는 인쇄된 글자에 대해 지나치게 존중하고, 그 글자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무지하다”고 파크스는 지적한다. 그의 시각에 따르면, 사람들은 책과 너무 수동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로 인해 교묘한 작가들에게 속기 쉬운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는 자신의 칼럼 「독자를 위한 무기(A Weapon for Readers)」에서 독자와 작가 사이의 관계를 일종의 ‘대결적 관계’로 전제하고 있다. 아니, 적어도 독자가 좀 더 경계심을 가져야 하는 관계로 본다. 더 나아가 독자가 ‘공격적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텍스트 위에 떠 있는 펜에는 어딘가 포식적이고, 심지어 잔인한 면이 있다”고 그는 쓴다. “들판 위를 나는 매처럼, 그 펜은 허점을 찾고 있다.” 이 문장에서 엿보이는 그의 비꼬는 듯한 미소는, 그가 단순히 펜을 든 독서를 권장하는 것이 아니라, 읽기의 행위를 일종의 적극적인 사냥으로 보도록 독자들을 유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책을 신성한 물건으로 여기며 최대한의 존중과 조심스러움으로 다뤄야 한다고 믿는 이들에게는 팀 파크스(Tim Parks)의 이처럼 맹금류 같은 태도가 충격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책을 의심하거나 경계하지 않더라도 마지널리아의 매력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뉴요커(The New Yorker)의 짧지만 유쾌한 글에서 로렌 콜린스(Lauren Collins)는 옥스퍼드 대학교 마지널리아 페이스북 그룹(Oxford University Marginalia Facebook group)의 운영자들을 찾아간다. 이 그룹의 구성원들은 대부분 대학원생으로, 도서관 책에서 발견한 기이하거나 흥미로운 여백의 낙서들을 게시한다. 콜린스에 따르면 이 그룹의 창립자인 에이프릴 피어스(April Pierce)는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의 저서를 우연히 발견했고, 이 책은 과거 시인 T.S. 엘리엇(T.S. Eliot)의 소장본이었다. 그리고 그렇다, 엘리엇은 책에 직접 메모를 남겼다.

피어스는 엘리엇의 마지널리아 일부를 자신의 학위 논문에 포함시킬 계획이라고 밝혔다. 물론 그중에는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이람? (What the devil does this mean?)”이라는 메모는 포함되지 않을 것으로 보이지만 말이다.

팀 파크스(Tim Parks)는 사람들이 오직 자신이 소유한 책에만 글을 쓴다고 전제하며, 이러한 마지널리아는 결국 훗날 자신만이 다시 읽게 될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는 이 점을 인터넷 기사에 남기는 공개적인 댓글들과 비교하며, 전자에 더 높은 가치를 둔다. (그는 아마도 인터넷 댓글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유일한 작가일지도 모른다.) 앞으로 수년 내에 누군가 우연히 — 아니, 의도적으로라도 — 과거의 댓글 스레드를 다시 찾아볼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그런 댓글들은 금세 소멸된다는 것이다.

반면,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펼쳐보며 수십 년 전 자신이 남긴 메모를 마주하는 경험은, 파크스의 말에 따르면 “자기 인식을 위한 매개체(a vehicle for self knowledge)”가 될 수 있다. 그는 책을 읽는 과거의 방식뿐 아니라, 그 책을 읽었던 과거의 독자이자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다시 만나는 기회가 된다고 말한다.

마지널리아(Marginalia)는 독서가 일방향적인 과정이라는 통념에 맞서는 행위다. 즉, 독자가 단지 마음을 열고 있으면 위대한 작가의 순수한 사상이 그대로 흘러들어온다는 식의 생각에 반기를 드는 것이다. 실제로 독서는 언제나 독자와 저자 간의 협업이다. 그리고 단순히 어떤 구절에 밑줄을 긋는 행위조차, 특정한 날 한 사람이 한 권의 책과 맺은 단 한 번뿐인 고유한 경험의 순간을 의미한다. 그 밑줄 자체가 그런 경험을 상기시킨다.

나중에 그 책을 다시 펼쳤을 때, 도대체 왜 그 문장에 밑줄을 그었는지 스스로 의아해할 수도 있다. 왜 그 페이지의 훨씬 나은 문장이 아니라 하필 그 문장을 골랐던 걸까 하고 말이다. 반면, 과거의 어떤 순간에 느꼈던 깨달음을 다시 생생히 떠올릴 수도 있다. 마지널리아는 바로 그처럼 기억과 사유, 자아와의 대화를 다시 열어주는 열쇠가 된다.

하지만 옥스퍼드 마지널리아 그룹(Oxford Marginalia group)이 보여주듯, 마지널리아는 혼자만의 즐거움에 그치지 않는다. 특히 이미 세상을 떠난 존경하는 작가의 여백 메모를 들여다보는 일은 짜릿하고 묘하게 친밀한 경험이 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텍사스대학교 오스틴 캠퍼스의 해리 랜섬 센터(Harry Ransom Center)는 고(故)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David Foster Wallace)의 개인 도서관에서 나온 책들의 내부를 디지털 이미지로 공개하고 있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그의 압축되고 급격히 기울어진 필체로 쓰인 알 수 없는 메모와 통찰들이 가득하며, 그것은 마치 작가가 독자에게 한 걸음 다가오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마지널리아는 꼭 유명인의 것이어야만 소중한 것은 아니다. 나는 한 번, 사랑하는 할머니가 남긴 주석 가득한 소설과 비소설 책들을 물려받은 여성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녀는 그 책들을 읽는 일이, 마치 가장 좋아하던 조부모와 다시 대화를 나누는 것 같다고 말했다. 마지널리아는 이처럼 기억과 정서, 그리고 관계를 연결해주는 매개로 남는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름 없는 낯선 이의 마지널리아조차도 매혹적이며 때로는 깨달음을 주는 경험이 되기도 한다. 오래 전, 지금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이유로 나는 샌프란시스코 공공도서관에서 한 권의 책을 읽고 있었다. 그 책은 시카고의 언론인 윌리엄 엘로이 커티스(William Eleroy Curtis)가 쓴 『터키와 그가 잃어버린 속국들: 그리스, 불가리아, 세르비아, 보스니아 (The Turk and His Lost Provinces: Greece, Bulgaria, Servia, Bosnia』(1903)였다. 이 책은 정치적 색채가 짙은 여행기이며, 문학적으로 특별할 것은 없었지만 커티스의 태도 덕분에 흥미롭게 느껴졌다.

그는 오스만 제국 말기의 비효율성을 묘사하면서, 떠오르는 신세계 출신의 시골 출신자가 은근히 겁먹은 채 우쭐대는 듯한 어투로 서술하고 있다. 예컨대 그는 “뉴욕에서는 하루에 처리되는 업무가 콘스탄티노플에서 1년 동안 일어나는 일보다 많다”는 식의 건방진 주장을 내놓는다. 또한 그가 묘사하는 이슬람은 온갖 편견이 뒤엉킨 혼란 그 자체다.

이처럼 저자의 관점 자체가 흥미롭긴 했지만, 이 책이 특별했던 이유는 텍스트 그 자체보다도, 그 여백에 남겨진 누군가의 메모 때문이었다. 낯선 독자가 오래 전에 책 속에 남겨 놓은 짧은 반응들, 동의나 반박, 혹은 놀라움의 표현들은, 책을 읽는 나와 어떤 미지의 인물 사이에 조용한 대화를 만들어주었다.

나는 그 책을 곧 포기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보다 먼저 이 책을 읽었던 또 다른 독자가 있었고, 그는 연필로 남긴 흔적을 책 곳곳에 남겨두었다. 그는, 아니 그녀는, 수십 년간 아무도 펼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 이 도서관 책에 낙서를 한 것이다.

그 독자는 윌리엄 커티스(William Curtis)의 보도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때때로 “거짓말!(Lies!)”이라는 글자를 반듯하고 각진 필체로 써넣었다. 나는 계속해서 책을 읽었고, 결국 그 메모들 자체와 특히 분노가 집중된 구절들을 통해, 마지널리아를 남긴 이가 분명 ‘그리스인’일 것이라는 추측에 이르렀다.

그의 메모는 단순한 낙서를 넘어, 과거와 현재, 저자와 독자, 그리고 민족적 기억이 교차하는 뜨거운 흔적처럼 느껴졌다.

커티스(Curtis)가 ‘터키인(the Turk)’에 대해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내 앞서 책을 읽었던 그 독자가 품고 있던 증오는 그보다 훨씬 더 깊고 격렬한 것이었다. 나는 그를 ‘그(he)’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이는 그가 남성이며 터키 사회와 근현대사를 직접 경험한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 머릿속에는 점차 그에 대한 희미한 초상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태평양 연안의 안개 낀 어느 외딴 도시에서 살아가는, 나이가 들고 마음에 응어리를 품은 망명자. 커티스가 서구 문명의 궁극적 성취라 여긴 미국식 편안함으로도 결코 달랠 수 없는 원한을 가슴속에 품고 있는 사람. 그의 마지널리아는 단순한 항의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자신의 민족이 겪은 고통과 분노를, 낯선 나라의 오래된 책 속에서 다시 마주친 듯한 반응이었다.

『터키와 그가 잃어버린 속국들(The Turk and His Lost Provinces)』은 단지 20세기 초 미국인의 건방진 자기만족을 무심코 드러낸 자화상으로서 그저 그런 재미만 줄 뿐, 그 자체로는 내 관심을 오래 붙잡을 만한 책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 앞서 이 책을 읽었던 독자는, 어느새 하나의 ‘등장인물’이 되어 있었다. 나는 커티스가 술탄을 조롱하며 늘어놓는 지겨운 재치보다, 그 독자에 대해 더 알아내고 싶어서 책장을 넘기게 되었다.

우리는 똑같은 책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읽었지만, 그런 점에서 우리는 세상의 모든 독자들과 닮아 있었다. 모든 독서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새로운 책을 창조하는 행위다. 만약 그 예전 독자의 흔적이 이 책의 페이지에 깃들어 있지 않았다면, 나는 『터키와 그가 잃어버린 속국들』을 기억하기나 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그는 여백을 긁어 책을 훼손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 책에 또 다른, 전혀 다른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었다.


출처 : sal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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