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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500년 넘은 고서를 다시 시민 곁으로, 라니쉬르마른 도서관의 문화유산 재생

2026년 09월 10일 | 관련

500년 넘은 책을 다시 시민 곁으로, 라니쉬르마른 도서관의 ‘잠들어 있던 유산’

프랑스 일드프랑스(Île-de-France) 센에마른(Seine-et-Marne)의 라니쉬르마른(Lagny-sur-Marne)에는 일반적인 공공도서관의 모습만으로는 쉽게 짐작하기 어려운 또 하나의 도서관이 존재한다. 제라르 빌리 미디어테크(Médiathèque Gérard-Billy)가 소장하고 있는 수천 권의 고서와 지역자료다. 일부는 15세기 인쇄 초기에 제작된 인큐나불라(incunabula)로, 500년이 넘는 시간을 견뎌왔다.

프랑스 지역매체 actu.fr가 소개한 이번 사례의 핵심은 희귀한 책의 존재 자체보다, 오랫동안 일반 이용자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장서를 다시 조사하고 목록화해 시민이 이해할 수 있는 문화유산으로 전환하고 있다는 데 있다. 보존 중심의 ‘수장고 자료’를 전시·교육·연구와 연결하는 공공도서관의 새로운 역할을 보여주는 사례다.

도서관 안에 숨어 있던 또 하나의 역사

  • 라니쉬르마른 도서관의 고문헌·지역자료는 약 8,200권 규모이며, 15세기 인쇄본을 포함한 희귀자료도 보존돼 있다.

라니쉬르마른에는 1868년부터 시립도서관이 운영되어 왔고, 현재의 제라르 빌리 미디어테크는 1989년 미디어테크로 전환됐다. 라니쉬르마른시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이 도서관은 약 1,600㎡ 규모로, 일반 장서와 어린이 자료, 음악·영상자료 외에도 고서 및 지역자료 약 8,200권을 별도로 보유하고 있다. 시 자료에는 이 가운데 약 2,400권이 1811년 이전에 출판된 것으로 소개돼 있다. 출처: Ville de Lagny-sur-Marne.

이 소장품은 8,200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Julia GUALTIERI

프랑스 국립도서관(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 BnF)의 프랑스 종합목록(CCFr)은 이 가운데 문화유산 장서를 보다 세분화해 약 6,926점의 문화유산 자료와 1,794점의 지역·지역사 자료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1830년 이전 자료 약 3,300책과 15세기 인쇄본, 필사본이 포함된다고 설명한다. 기관별 집계 기준과 조사 시점이 달라 전체 권수에는 차이가 있지만, 라니의 공공도서관이 상당한 규모의 역사자료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출처: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 CCFr.

  • 가장 오래된 자료 가운데에는 1490년대에 인쇄된 인큐나불라가 포함돼 있다.

인큐나불라(incunabula)는 일반적으로 유럽에서 활판인쇄술이 등장한 이후 1501년 이전에 인쇄된 책을 의미한다. 라니쉬르마른의 장서에서는 하나의 제본 안에 여러 인쇄물이 함께 묶인 합본이 발견됐다. 프랑스 문화부 산하 일드프랑스 문화국(DRAC Île-de-France)의 조사보고서는 당초 한 권의 인큐나불라로 알려졌던 책을 조사한 결과 서로 다른 7편의 15세기 인쇄물이 하나의 책으로 묶여 있었다고 기록한다. 출처: Ministère de la Culture, DRAC Île-de-France.

이 사례는 오래된 자료의 가치가 단순히 ‘몇 년이나 되었는가’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동일한 책 안에서도 인쇄 시기와 판본, 종이, 제본 방식, 이전 소장자의 흔적을 조사하면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새로운 서지적 가치가 드러날 수 있다.

책은 시대에 따라 제본 방식이나 인쇄 용지가 다르고, 보존에 따르는 어려움도 다르다. ©Julia GUALTIERI

왜 이제야 이 장서를 다시 조사하기 시작했나

  • 프랑스가 지역 공공도서관에 흩어져 있는 문화유산 자료를 국가 차원에서 파악하기 시작한 것이 직접적인 배경이다.

라니쉬르마른의 고서 정리는 개별 도서관의 단독 프로젝트라기보다 프랑스의 문화유산 장서 국가 확인계획(plan national de signalement des fonds patrimoniaux)과 연결되어 있다. 마른에공두아르 광역공동체(Communauté d’Agglomération de Marne et Gondoire)는 일드프랑스 문화국(DRAC)의 요청에 따라 지역 미디어테크에 남아 있는 고서를 식별하고, 목록화하고, 보존 상태를 점검하는 사업을 추진해왔다.

2024년 활동보고서는 라니쉬르마른에 보관된 고서·지역자료가 약 8,200권이며, 당시 기준 약 2,400권이 1811년 이전 자료라고 밝혔다. 즉, 장서는 오래전부터 존재했지만 이를 현대적인 서지정보 체계 안에서 다시 확인하고 국가 목록과 연결하는 작업은 비교적 최근에 본격화된 것이다. 출처: Communauté d’Agglomération de Marne et Gondoire, Rapport d’activité 2024.

  • 문제는 책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웠다는 데 있었다.

오래된 지방도서관의 문화유산 장서는 여러 시대의 기증·이관·구입을 거치면서 형성된 경우가 많다. 당시의 목록작성 방식이 현재와 다르고, 하나의 책에 여러 문헌이 함께 제본돼 있거나 소장자의 기록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어 일반 장서처럼 단순하게 정리하기 어렵다.

라니 사례에서도 고서 분야를 전문적으로 연구해온 전직 사서 미셸 르누프(Michel Renouf)와 도서관 담당자가 자료를 하나씩 확인하는 방식으로 정리작업을 진행해왔다. 마른에공두아르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르누프는 2006년 파리 생트주느비에브 도서관(Bibliothèque Sainte-Geneviève)에서 약 200시간의 고서 목록작성 교육을 받은 뒤 관련 작업을 이어왔다. 출처: Marne et Gondoire Hebdo.

고문헌 정리는 책의 제목과 저자를 입력하는 수준을 넘어선다. 판형과 판본, 인쇄소, 활자, 삽화 제작자, 장정, 소유표시, 주석, 훼손 상태까지 살펴야 한다. 르누프가 이 과정을 일종의 ‘탐정 조사’에 비유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보존을 넘어 ‘보여주는 문화유산’으로 바뀌고 있다

  • 정리된 고서는 수장고에 다시 넣는 것이 아니라 전시와 강연, 주제별 프로그램을 통해 시민에게 공개되고 있다.

라니쉬르마른의 변화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목록화와 보존이 이용자 서비스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마른에공두아르의 최근 활동보고서는 지난 수년간 ‘여성과 책’, ‘18~19세기 세계 여행기’, ‘19세기 파리 만국박람회 앨범’, ‘식물학자와 여행’과 같은 주제로 문화유산 장서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운영됐다고 설명한다. 출처: Communauté d’Agglomération de Marne et Gondoire, Rapport d’activité 2025-2026.

2026년 6월에는 고서와 미술책을 함께 살펴보는 ‘책 속의 예술(L’art en livres)’ 프로그램도 열렸다. 중세 필사본의 안료에서 현대미술의 모노크롬(monochrome)에 이르기까지 색의 역사와 상징을 고문헌과 미술자료를 통해 살펴보는 방식이었다. 오래된 책을 단독 유물로 전시하는 대신 오늘날 이용자가 이해할 수 있는 주제를 통해 다시 읽게 한 것이다. 출처: Marne et Gondoire.

  • 2026년에는 ‘위험에 처한 문화유산’을 주제로 보존과 복원 과정 자체를 전시 콘텐츠로 공개했다.

2026년 9월 8일부터 26일까지 제라르 빌리 미디어테크에서는 ‘위험에 처한 문화유산(Le Patrimoine en danger)’ 전시가 운영된다. 사라진 건축물을 기록한 판화, 약해진 제본, 찢어진 페이지, 복원된 자료 등을 통해 고서를 보존하는 사서의 업무를 시민에게 설명하는 프로그램이다. 즉, 완성된 ‘보물’만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훼손과 보존, 복원이라는 과정까지 문화유산 교육의 일부로 다룬다. 출처: Marne & Gondoire Tourisme.

이는 공공도서관의 문화유산 서비스가 ‘보관’에서 ‘해석’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책을 보호하는 것만으로는 시민이 그 가치를 알기 어렵지만, 자료가 왜 희귀한지,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졌는지, 왜 훼손됐으며 어떻게 복원되는지를 설명하면 고문헌은 지역사회가 공유하는 역사자료로 전환된다.

작은 지역도서관의 장서가 국가 문화유산으로 연결되는 방식

  • 라니의 고문헌은 지역도서관 내부 목록에 머물지 않고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국가 단위 서지망으로 편입되고 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은 2024년 프랑스 종합목록(CCFr) 관련 자료에서 라니쉬르마른의 고서, 탐험·여행자료, 지역자료, 나폴레옹 관련 자료, 펠레(Pelet) 장군 컬렉션 등에 대한 목록정보 등록과 원고목록 공개가 진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출처: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

이 과정은 문화유산의 위치를 바꾼다. 한 지방도서관 수장고에만 존재하던 책이 국가 통합목록에 등록되면, 다른 지역의 연구자가 해당 자료의 존재를 검색할 수 있고 동일 판본이나 관련 장서와 비교할 수 있다. 결국 ‘지역의 오래된 책’이 연구 가능한 국가적 지식자원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도서관에는 제임스 쿡의 여행기 원본들이 소장되어 있다. ©줄리아 괄티에리

  • 라니 사례의 핵심은 희귀자료를 대형 국립기관으로 이전하지 않고, 지역에 그대로 보존하면서 접근성을 높였다는 점이다.

문화유산의 중앙집중적 보존은 전문성 측면에서는 효율적일 수 있지만, 자료가 형성된 지역의 역사와 맥락이 약해질 가능성이 있다. 라니쉬르마른은 장서를 지역에 유지하면서 국가서지망과 연결하고, 지역 전시와 프로그램을 통해 다시 시민에게 돌려주는 방식을 택했다.

이 구조는 ‘지역 보존(local preservation)–국가 목록화(national cataloguing)–시민 활용(public access)’이라는 세 단계가 함께 작동할 때 문화유산 장서의 가치가 커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 도서관에도 중요한 것은 ‘희귀본의 발견’보다 ‘발견할 수 있는 체계’다

  • 한국에서도 지역기관과 개인 소장 고문헌을 하나의 목록으로 연결하는 작업이 이미 진행되고 있다.

한국의 상황과 비교하면 라니 사례의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국립중앙도서관의 한국고문헌종합목록(KORCIS)은 2007년 약 32만 건의 서지데이터를 바탕으로 구축됐으며, 2026년 현재 국내 92개 기관과 국외 53개 기관 등 총 145개 기관의 서지정보 약 51만7천 건, 원문이미지 약 6만6천 건을 제공한다. 매년 3,000건 이상의 서지·원문 데이터가 추가되고 있다.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한국고문헌종합목록.

이는 라니쉬르마른 사례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가치 있는 자료가 반드시 국립도서관에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도서관·박물관·교육기관·사찰·문중·개인 소장처 등에 흩어진 자료의 존재를 먼저 파악하고 표준화된 서지정보로 연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 향후 국내 공공도서관의 문화유산 정책도 ‘보존 여부’뿐 아니라 조사·목록화·디지털화·교육 활용을 하나의 과정으로 설계할 필요가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은 고문헌을 포함한 주요 소장자료를 디지털컬렉션으로 구축해 일반 이용자가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귀중본을 단순히 디지털 이미지로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금속활자, 고전문학, 법전 등 주제별 맥락을 함께 제공한다.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컬렉션.

라니쉬르마른이 보여주는 시사점도 같은 방향에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도서관에 오래된 책이 있다’는 사실이 아니다.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정확히 조사하고, 다른 기관의 자료와 연결하고, 이용자가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로 다시 해석하는 과정이 있어야 비로소 장서는 살아 있는 문화유산이 된다.

특히 지역 공공도서관에서는 지역사 자료, 기증문고, 근대 잡지, 오래된 사진과 지도, 지역 인물의 자료 등이 일반장서와 분리된 채 충분히 활용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라니 사례는 이러한 자료를 ‘보존해야 하는 오래된 물건’이 아니라 전시·수업·지역연구·시민교육을 만드는 콘텐츠로 바라볼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500년이 넘은 책을 다시 살린 것은 복원기술만이 아니다. 그 책의 존재를 다시 찾아내고, 기록하고, 설명하고, 시민 앞에 꺼내놓은 과정 전체가 ‘재생’이라고 할 수 있다. 공공도서관이 기억기관(memory institution)으로서 수행할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인 역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관련 자료

참조: actu.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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