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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현대 도서관이 고대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하는가? 다시 생각해 보자.

2025년 11월 28일 | 관련

칼럼: 도서관의 역사는 길고, 여러 신화와 관념에 둘러싸여 있다. 놀랍게도 오늘날의 도서관은 고대나 르네상스가 아니라, 이른바 ‘암흑기’로 불리는 시대에서 출발했다.

현대적인 도서관 제도가 그리스·로마 고대에서, 혹은 그보다 더 이른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시작됐다는 인식은 널리 퍼져 있다. 실제로 약 2,000년 전 로마, 아테네, 페르가몬, 알렉산드리아 같은 도시에는 언어, 저자, 주제에 따라 장서를 정리한 거대한 도서관이 존재했다.

이 고대 도서관들은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영향은 2021년에 출간된 외이빈 프리스볼(Øivind Frisvold)의 저서 『지식은 힘이다(Kunnskap er makt). 노르웨이 도서관사: 문화, 정치, 사회』에도 미친다. 이 책은 초기 도서관사의 개요를 제시하며 독자를 고대와 그 이전의 맥락으로 이끈다.

그러나 다른 많은 개설서와 마찬가지로, 프리스볼 역시 서기 500년에서 1000년 사이, 이른바 ‘어두운 세기’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사라진 유산인가

고대 도서관과 그 극적인 몰락에 대한 낭만적 상상은, 로마 제국 붕괴 이후 문화적 정체와 쇠퇴가 이어졌다는 일반적 서사와 맞물려 이러한 인식을 강화해 왔다.

초기 중세의 사서들은 쥐와 도둑을 상대로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을 벌였다.

그 대표적 사례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화재에 대한 고전적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가장 냉정한 사람에게조차 감정적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아르헨티나 작가 알베르토 망겔(Alberto Manguel)은 이렇게 말했다. “그 파괴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모은 모든 것이 결국 사라질 수 있다는 경고를 본다.”

도서관의 잊힌 기원

그러나 가장 오래된 유럽 도서관의 실제 유산, 즉 도서관 목록, 쥐가 갉아먹은 필사본, 장서 목록을 살펴보면, 현대 도서관의 시작은 전혀 다른 곳에 있다. 바로 8세기 말 프랑크 왕국의 초기 중세다. 프랑크 왕국은 로마 제국 붕괴 이후 유럽 최대의 제국이었으며, 오늘날의 프랑스와는 구별된다.

이 제국이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은 약 8,000점에 이르는 귀중한 필사본이다. 이 책들 속에서 우리는 중세 후기와 말기까지 이어진 도서관 체계의 초기 형태를 발견한다. 이 체계는 현대 서구 도서관 제도의 기술적 기반을 마련했다.

바빌론에서 데이크만까지

그렇다면 고대는 어떤가. 그 이전의 수메르인과 아시리아인, 다른 고대 문명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대영박물관(The British Museum)을 방문하면, 소장품 상당수가 니네베에 있던 아슈르바니팔 도서관에서 나온 점토판 문서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도서관은 기원전 700년경 설립됐다.

도서관은 다양한 문화권에서 존재해 왔지만, 지식을 관리하고 저장하는 개별적 시스템은 크게 달랐다. 다시 말해, 각기 다른 역사와 전통을 지녔다.

오늘날 서구의 도서관 제도, 노르웨이에서는 ‘공공도서관’ 또는 ‘시민도서관’으로 불리는 체계는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이 제도는 듀이 십진분류법(Dewey Decimal Classification)처럼 모든 책에 000에서 999까지의 숫자 코드를 부여하는 표준화된 분류 체계를 특징으로 한다. 디지털화된 목록과 대출, 접근성을 중시하는 점도 핵심 요소다. 그러나 이러한 시스템 역시 그 뿌리를 추적하면 중세에 형성된 행정적 전통과 실천으로 이어진다.

도서관의 형태가 갖춰지다

초기 중세의 도서관 문화는 후기 고대 교부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카시오도루스(Cassiodorus, 약 490–585),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약 342–420), 세비야의 이시도르(Isidor of Seville, 약 560–636)는 잘 갖춘 기독교 도서관이 무엇을 포함해야 하는지를 규정했다.

이러한 흐름은 교황 겔라시우스(Gelasius, 재위 492–496)의 이름을 딴 겔라시우스 칙령(Gelasian Decree)에서 특히 분명히 드러난다. 이 문서는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등장할 때까지 지속된 삼분법적 지식 위계를 정립하는 데 기여했다.

다만 교부들이 도서관의 내용에 영향을 미쳤을 뿐, 도서관이라는 제도를 실제로 작동하게 만든 실무적 조직 방식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목록 작성, 서가 배열, 대출 같은 실질적 시스템은 8세기 프랑크 지역의 수도원과 주교좌 학교에서 처음 등장했다.

지식을 관리하다

그 시기에 어떤 혁신이 이루어졌을까. 초기 중세의 주요 학문 중심지 자료를 보면, 독립된 도서관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더 중요한 점은 당시 사서들이 오늘날에도 익숙한 도서관 실무를 발전시켰다는 점이다. 주제별 서가 배치, 개인 대상 대출, 기관 간 협력 같은 방식이 이때 자리 잡았다.

장크트갈렌 수도원 도서관(Sankt Gallen) 도서관 목록의 표지(약 860년). 여백과 행간에 사서가 덧붙인 작은 주석들이 보인다. (출처: 장크트갈렌 수도원 도서관(St. Gallen, Stiftsbibliothek), 코덱스 728, 5쪽

대형 도서관의 사서들은 장서를 주제와 저자 기준으로 정리한 방대한 목록을 남겼다. 초기 중세를 거치며 도서관은 장서를 확장하고 체계화했고, 그 결과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유럽 도서관 발전의 토대를 놓았다.

초기에는 장서 규모가 비교적 작았다. 그러나 9세기에 들어서면 책과 도서관 수가 급격히 늘어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필사본은 수백 장의 송아지 가죽으로 만들었고, 상아와 금, 은으로 장식되기도 했다. 그만큼 경제적 가치가 컸다.

이러한 가치 때문에 도서관은 약탈의 대상이 되었다. 바이킹, 유목 민족 마자르인, 심지어 다른 기독교 집단까지 무단으로 침입했다. 그들의 목적은 독서가 아니라 약탈이었다.

한 단편적 목록에는 사서가 이렇게 적었다. “이것이 노르만인의 약탈 이후 남은 책들이다.” 도난만이 위협은 아니었다. 습기와 곰팡이, 설치류, 부주의한 사용도 귀중한 필사본을 쓸모없는 잔해로 만들었다.

지식의 수호자들

9세기 성 갈렌 수도원의 도서관 목록에는 당시 사서의 좌절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는 책의 상태를 기록하며 “사용 불가” 같은 짧은 평을 남겼고, 더 나아가 “아무 쓸모도 없다”는 탄식도 덧붙였다.

마침내 이시도르 저작 전체를 두고 그는 이렇게 적었다. “이 모든 것은 완전히 파손되어 사용할 수 없다.”

초기 중세의 사서들은 쥐와 도둑을 상대로 끝없는 싸움을 벌였다. 그럼에도 이들이 남긴 제도와 관행은 점차 서구 도서관 체계의 기반이 되었고, 오늘날 우리가 아는 현대 도서관으로 이어졌다.


출처 : www.forskersonen.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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