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리아의 대도서관은 인류 역사상 가장 야심찬 지적 업적 중 하나였다. 그것은 지식이 경계를 모르고, 지혜를 추구하는 것이 신성한 의무였던 장소였다. 이 도서관은 기원전 3세기, 번영하던 이집트 도시 알렉산드리아에 설립되었으며, 단순한 도서관이 아니라 학문의 기관이자, 다양한 문화가 융합된 용광로였으며, 학자, 과학자, 철학자들을 세계 각지에서 불러 모은 계몽의 등대였다.
그러나 그 모든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은 영원히 지속되지 못했다. 전쟁, 화재, 그리고 정권 교체로 인해 그 유산은 점차 훼손되었으며, 엄청난 양의 귀중한 지식이 사라졌다.
그 파괴의 정확한 세부 사항은 여전히 신비에 싸여 있지만, 우리가 추측해 본다면, 무엇이 그 몰락을 초래했을까? 이 갤러리를 클릭하여 그 이유를 확인해 보라!
도서관은 고대 세계 전역에서 온 필사본을 소장하고 있었으며, 그중에는 그리스, 이집트,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인도의 문서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유대교, 조로아스터교, 불교 경전도 보관되어 있었으며, 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다양성 있는 지식 모음 중 하나를 이루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통치자들은 지식을 추구하는 데 있어 가차 없었다. 그들은 대리인들을 세계 곳곳으로 보내어 필사본을 찾아 확보하게 했으며, 종종 원본 작품에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을 지불하기도 했다. 이러한 텍스트 보존에 대한 집착은 알렉산드리아를 기록된 지식의 가장 풍요로운 보고로 만들었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 통치 아래 시행된 독특한 법에 따르면, 알렉산드리아에 입항하는 모든 선박은 소지한 책을 도서관에 제출해야 했다. 필사자들이 해당 문서를 복사한 후, 원본은 도서관에 보관되고 사본이 선박에 반환되었다. 이 정책은 도서관의 지속적인 확장을 보장하는 역할을 했다.
기원전 3세기 중반, 그리스인 사서 칼리마코스는 세계 최초의 도서관 목록인 피나케스(Pinakes)를 작성했다. 이 시스템은 역사, 시, 법률, 수학 등 주제별로 두루마리를 분류하여 학자들이 특정 문서를 더욱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했다. 그의 작업은 현대 도서관 분류법의 기초가 되었다.
도서관의 몰락은 단일한 사건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진행된 과정이었다. 정치적 불안정, 통치자의 교체, 그리고 재정 지원의 감소가 도서관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시간이 흐르면서 두루마리들은 사라지거나, 도난당하거나, 파괴되었으며, 그로 인해 한때 명성이 높았던 도서관의 위상도 크게 훼손되었다.
기원전 2세기, 프톨레마이오스 8세 치하에서 발생한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알렉산드리아 출신이 아닌 학자들이 추방당했다. 이들 중에는 수석 사서였던 사모트라케의 아리스타르코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지적 유출은 도서관의 힘을 약화시켰으며, 학자들은 아테네, 로도스와 같은 다른 도시로 흩어지게 되었다.
기원 후 391년,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는 열렬한 기독교 신자로서 이교도 사원들의 파괴를 명령했다. 그 중에는 세라페움도 포함되어 있었다. 테오필로스 주교가 이 작전을 이끌었고, 그 결과 세라페움 신전이 파괴되었으며, 이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남아 있던 마지막 지식의 보고 중 하나를 소멸시킨 사건일 수 있다.
2002년, 이집트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Bibliotheca Alexandrina)이 개관되었으며, 이는 고대 도서관에 대한 현대적인 헌사로서 의미를 갖는다. 이 도서관은 문화적이고 지적 중심지로서 알렉산드리아가 지식의 등대로서 역사적인 역할을 되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인류의 호기심과 학문에 대한 역사상 가장 큰 상징 중 하나로 여전히 남아 있다. 비록 도서관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 역사는 여전히 미래의 유사한 지식 상실을 막기 위해 노력하는 학자들, 교사들, 역사학자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출처 : www.msn.com